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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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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3-07-2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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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받는 퇴계 이황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두루 지냈으며,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한 그는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써 한국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룬 대학자였다.

 

젊어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단양군수, 풍기군수, 충청도 암행어사 등을 거쳐 좌찬성, 판중추부사(중추부의 종1품 벼슬)와 같은 높은 벼슬을 지냈던 이황이지만, 스스로 벼슬을 사양한 횟수가 70여회에 이른다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자리에 연연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임금이 “그대는 탁월하여 맑고 깨끗하며 세상에 드문 훌륭한 문장이나, 공명을 탐하지 않고 시골로 들어가 한가로이 살고 있으니, 그 벼슬에서 물러난 뜻은 가상하나 짐은 항상 네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짐의 정성이 부족하여 어진 이들이 조정에 나와 벼슬을 하지 않고 숨으니 내 마음의 아쉬움이 커 잊지 못하노라.”라고 간곡히 부르면 마지못해 올라 왔다가도 틈만 있으면 또 몸에 병이 깊다는 핑계로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갔다.

 

그러다가 명종22년(1567) 나라에서 간곡히 불러 중국사신을 접대하라는 접반사의 일을 맡겨 어쩔 수 없이 올라왔는데, 접반사에 임명되기도 전에 이황을 부른 명종이 승하하였다. 그래서 이황은 조정에 머무르면서 명종의 행장(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지었다. 그러고 나니 그에게 예조판서를 맡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황은 예조판서 벼슬을 고사하고 기어이 시골로 내려가기를 고집하였다.

 

그 고집을 꺾으려고 율곡 이이가 이황을 찾아가 말했다. “선생님, 지금 나라에는 어린 임금이 마침 즉위하여 어려운 일이 많고 , 또 신하는 이런 때에 마땅히 새 임금에 대한 도리를 헤아려야 할 것이오니 선생께서는 시골로 물러가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벼슬이라는 것은 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지만 만약 남에게 이익을 미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우환이 절박해 있다면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이익을 미치지 못할 바엔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이황의 ‘물러나는 용기’는 오늘날 공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황이 서울에 임시로 살 때의 일이다. 이웃집에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밤이 달리고 영글어 뜰에 떨어졌다. 그것을 본 이황은 혹시 아이들이 그 밤을 주워 먹을까 걱정하여 얼른주어서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다. 다른 사람의 것에 대한 사심을 경계했던 이러한 이황의 청렴(淸廉) 결백함도 앞으로 우리 공직자들이 되새겨 봐야할 덕목이다. /박원철 경기도 청렴대책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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